
안녕하세요. 오늘은 다가오는 어린이 날을 생각하며 방정환 선생님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합니다.
다들 알다시피 소파 방정환선생님은 어린이운동의 창시자, 선구자로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오늘 알아볼 것은 방정환선생님의 출생과 성장을 살펴보고 민족운동, 청년운동, 3.1운동, 소년운동 등 나누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출생과 성장배경
방정환 성생은 1899년 11월 9일 서울의 야주개(지금의 당주동)에서 출생하였습니다. 족보 및 기록등을 보면 방정환선생은 2남 3녀 중 둘째로 태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방정환 선생의 집안의 성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가 태어낫을 무렵 그의 술회를 통해 알 수 있듯 매우 부유한 집안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홉 살 때에 큰 집에서 쫒겨나며 가세가 기울었다고 합니다.
가세가 기운 뒤 가족들은 사직동 도정궁앞의 초가로 이사했고. 그의 조부와 부친은 인쇄소 직공으로 취직하여 생계를 유지하게 되었으나 경제적으로는 매우 궁핍하였 던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그는 매우 명랑하고 친구들 사이 에서도 리더십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는 1908년 소년입지회의 활동을 통해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의 민족운동
방정환 선생의 민족운동은 천도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소년입지회와 경성청년구락부는 물론 천도교소년회와 천도교 청년회의 활동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1913년 선린상업학교에 입학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공부에는 뜻이 없었고, 신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독서에 주력하였습니다. 14살 때인 1914년을 전후로 졸업을 1년 앞 둔 시기에 선린상업학교를 중퇴하였습니다. 이후 경성청년구락부는 방정환이 소년입지회의 활동의 연장선에서 조직된 것으로 판단됩니다. 소년입지회를 졸업할 정도의 나이인 14세부터의 청소년들로 경성청년구락부를 조직한 것으로 확인되는데, 유광렬은 이 경성청년구락부가 1918년 무렵 회원이 200여명이었다고 증언하였습니다. 이로 보아 방정환선생은 소년운동단체를 청소년운동단체로까지 확장하여 지속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편 경성청년구락부 조직 이후 방정환은 천도교주 손병희의 사위로서 교내에서도 상당한 주목을 받는 위치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관계로 방정환은 손병희가 기독교세력과 3.1운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는 당시의 민족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젊은 지식인들에게 희망이 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방정환 선생은 어떠한 방법으로 민족지도자들의 활동을 뒷받침하였을까요. 이에 대해서는 유광렬과 이태운의 회고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이의 회고에 따르면 방정환은 유광렬과 함께 재동의 방정환의 처가에서 등사판으로 독립신문을 출판하여 시민에게 돌렸다고 합니다. 독립신문은 1919년 3.1일 이른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이며 인쇄소 보성사의 사장이던 이종일이 발의하여 윤익선의 명의로 발간된 지하 신문입니다. 독립신문은 1만장 혹은 1만 5천장이 발행되었는데, 시가행진하는 군중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새벽에 15 ~ 16세의 남녀학생들이 다른 신발은 소리가 난다 하여 짚신을 신고 밤을 새워 배달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 경찰이 방정환의 집을 포위하고 수색하려 하자 방정환이 민첩하게 등사판과 원지를 자기 집 마당의 우물에 넣어 증거를 없애 무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경찰은 방정환을 체포하여 일주일 동안 구금하면서 온갖 고문을 가하였으나 방정환은 자백을 하지 않았고, 석방된 이후 방정환은 비밀장소에서 계속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소년운동
방정환선생은 1920년 어린이 노래를 번역하여 소개하면서 어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즉 방정환선생은 어린이라는 용어를 늙은이, 젊은이라는 용어와 대등한 의미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어린이를 비하하거나 낮추어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하여 부르자는 의미라 생각됩니다. 이렇게 어린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개념을 도입하고 강조했던 그이지만 소년이라는 용어도 계속 사용하였습니다. 그는 어린이를 대략 10세 정도로, 10세 이상의 연련층은 소년이라고 구분하였던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사회적으로 보통 인식되는 어린이와 소년의 연령은 그로부터 비롯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방정환선생은 1923년 3월 16일 동경 센다가야 온덴 101번지 방정환이 하숙하던 집에서 방정환, 강영호, 손진태, 고한승, 정순철, 조준기, 정병기등과 함께 어린이문화단체인 색동회를 조직하였습니다. 색동회 조직 과정에서 진장섭과 방정환의 제안에 따라 어린이날 제정을 주장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방정환을 중심으로 한 소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과정에서 조선소년단, 조선소년군, 불교소년회 등 도 조직되었습니다. 방정환은 1923년 4월 17일 이들 단체 등 40여개의 소년운동단체와 함께 조선소년운동협회를 조직하였고 그리하여 어린이날을 조선소년운동협회가 주관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치며..
1931년 7월 10여년에 걸쳐 소년운동 뿐만 아니라 청년운동 등의 민족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그는 무리한 활동으로 신장염과 고혈압등으로 만 31세의 짧은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대한민국정부는 1990년 방정환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습니다.
이로써 오늘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을 알아보는 시간이였습니다. 그의 애국정신과 어린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현대인의 우리가 또한 가져야할 자세인 것 같습니다. 최근 저출산문제로 많은 아이들이 점점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우리의 미래를 바라보기 위해서는 조금더 다가가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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