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개요.
1960~70년대에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로, 좁게는 1975년부터 1979년까지 폴 포트가 주도하던 민주 캄푸치아에서 크메르 루주가 사람들을 대규모로 처형한 사건을, 넓게는 이를 전후로 캄보디아에서 일어난 학살을 일컫는 말입니다.
르완다 학살과 함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전체 현대사는 물론, 인류 역사 전체를 통틀어서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비극 중 하나로 여겨지며, 홀로코스트와 함께 포스트 모더니스트에게 '근대의 실패', '이성의 실패'를 드러내는 사례로서도 꼽힌다. 킬링필드의 참혹성을 보여주는, 해골이 야지에 무더기로 쌓여 있는 사진들로도 유명합니다. 캄보디아는 5월 20일을 공휴일로 지정해 크메르 루주와 폴 포트에 의한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있습니다.
킬링필드 종결 26년 후인 2005년 기준 캄보디아의 인구별 연령대 분표. 24세 이하와 25세 이상 인구 비율이 대조적입니다.
'킬링필드'라는 표현은 민주 캄푸치아 정권에서 살아남은 캄보디아의 사진기자 디트 프란(ឌិត ប្រន, 1942~2008)이, 민주 캄푸치아의 패망 후 태국으로 탈출할 때 보았던 희생자들의 시체 더미와 유골을 지칭하기 위해 만든 표현입니다. 여담으로 디트 프란도 민주 캄푸치아 정권 하에서 형제 3명과 자매 1명을 잃었습니다.
2.배경
1969년 3월, 미 공군이 아침 식사 작전(Operation Menu)이라고 불리는 동부 캄보디아 지역에 대한 대규모 폭격을 시행했다. 이 공습으로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COSVN, 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에 얼마간의 타격을 주긴 했지만, 효과는 미미했고 결정적으로 호치민 루트를 단절시키지는 못했습니다. 이후 북베트남 남부전선 사령부가 계속해서 이동하며 게릴라전을 벌이자, 미국은 폭격 지역을 확대했다. 하지만 여전히 큰 소득을 얻지는 못했고 남베트남과 미국의 연합군의 작전이던 '슈메이커 작전' 역시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1970년 3월, 캄보디아의 일부 군부 세력이 미국과 결탁해 친미 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중립정책을 펴던 시아누크 국왕은 축출되었고 친미세력인 론 놀이 시아누크 국왕을 대신하여 집권하게 되었다. 이후 미국의 공습이 더욱 격화되었고, 계속된 폭격으로 캄보디아의 농지는 황폐화되었다. 기반 산업인 농업이 무너지자, 경제가 붕괴되면서 캄보디아가 직면한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100만 명 이상의 피난민이 수도 프놈펜으로 몰려들었지만 식량난과 국제적 고립에 처한 캄보디아는 실향민 및 난민들을 감당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에게 식량지원을 받았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미국에 대한 의존도를 높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사실 이러한 미국의 캄보디아 폭격은 베트남에서 미군이 철수할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일 뿐이었습니다. 또한, 거의 종결되어가던 베트남전쟁의 확전을 부추겼습니다. 계속되는 폭격으로 론 놀 정부에 대한 민심 이반이 생긴 상태에서 미군이 베트남에서 철수하자, 캄보디아에는 캄보디아나 남베트남 군이 메울 수 없는 정치적·사회적 공백이 생겼다. 결국 이 공백을 틈타 기회를 엿보던 크메르 루주가 캄보디아의 정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3.크메르 루주의 악행
시아누크 국왕은 크메르 루주에 의해 복귀하는 듯 했으나, 크메르 루주는 곧 1976년에 시아누크 국왕에게 온갖 혐의를 씌워 가택 연금을 시키고 국명을 민주 캄푸치아로 바꿨다고합니다. 미군의 폭격으로 인한 농업의 붕괴로 실업과 식량난에 처한 사람들이 수도에 몰려들었으나, 이들을 자력으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했고, 반미 노선으로 인해 미국의 식량 지원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크메르 루주는 경제 성장과 식량난을 곧 극복하겠다는 말로 이들을 달래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크메르 루주는 마오쩌둥 사상을 추종하여 폴 포트 본인이 마오쩌둥의 인민 전쟁에 영감을 받았다는 발언을 몇 번 하기도 했다. 크메르 루주는 문화대혁명식 농촌 강제 이주를 결심했는데 이 결정은 수천년 역사의 고국을 초기화시켜 버린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보다도 더욱 가혹했습니다.
이 전대미문의 대악행 중의 대악행을 저지른 크메르 루주의 수장 폴 포트는 프랑스 유학 시절 사회주의에 심취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며 일종의 열성 엘리트로서 지식과 학력은 높았으나 사회 운영이나 갈등 조정에 관한 지혜가 부족했고 가치관도 상당히 잘못되어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처음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하면 사회가 안정화될 것이라며 환영했던 민심이 괴상한 정책의 시행으로 떠나가기 시작하자 폴 포트는 더욱 추잡한 방법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폴 포트는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죽여야 한다.'는 이른바 자국민을 대상으로 한 홀로코스트 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런 추악한 논리로 자국민들을 학살하던 폴 포트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1977년 9월 "혁명에 반대하는 전체 인구의 12% 만이 제거됐다"고 주장하며 학살을 조장하고자 했으나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1978년에는 캄보디아 인구의 2030% 가 여전히 제대로 먹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해 후술할 극단적인 통제들을 일부 완화했으며 사형도 '당과 혁명, 인민에게 절대적으로 적대적인 자들'이나 '스스로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대상'으로 한정지어 임의적인 처형을 줄이고자 했으며 지방에 하방된 귀국 유학생들을 프놈펜으로 보냈고 공장들에서는 '부르주아의 상징'으로 간주되던 전문기술 교육을 재개했으며 심지어 외무부 간부들을 양성하기 위한 외국어, 비서 관련 업무 교육과 국립공업전문대학 신설까지 실시되었습니다.
물론 폴 포트는 자신의 정책 실패의 원인을 정책 그 자체의 문제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았고 오히려 지도부에 배신자나 스파이가 숨어 '파괴활동'을 자행해서 그럴 거라고 믿었으며 이로 인해 그와 동시에 집권 이래 최대의 숙청 작업도 진행되어서 '중앙에서 결정된 숙청'이 계속 실시되어 수만 명이 처형당한 것은 물론이고 폴 포트가 집권할 때 22명에 달하던 공산당 중앙위원회 의원이 폴 포트가 축출될 무렵에는 단 4명만 살아남았습니다. 심지어 베트남과 국경을 맞댔으며 베트남과 밀접한 연관을 맺은 간부들이 우세했던 데다 친베트남 성향이었던 캄보디아 동부 지역에서는 폴 포트가 '너무 온건하다'고 생각한 동부 지역의 간부들에 대해 당 중앙군을 동원해 동부 지역을 침공해 가면서까지 당, 군대 및 인민 모두에 대한 대규모 무차별 숙청을 가했고 이에 따라 단 6개월 만에 동부 지역에 살던 약 150만 명 중 무려 25만 명이 사망했는데 이는 폴 포트 정권 하에 있던 모든 학살 중 가장 심각했다고 전해집니다. 이 과정에서 탈출한 간부들 중 일부는 베트남으로 피신했고 일부는 다른 지역에서 또다시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하술할 내용들을 보면 알겠지만 폴 포트의 악행들은 문자 그대로 사실상 전국민을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혁명화구역에 강제 입소시킨 것과 똑같았다고합니다.
4.관련 영화
킬링필드(1984)
이스케이프 (2015,원재 No escape)
그들이 아버지를 죽였다 (2017,First They Killed My Father)
1975킬링필드, 푸난 (2018, Fun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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